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타구치 렌야 (문단 편집) === [[임팔 작전]] === >군문에 몸을 담은 지 어언 30년. 이렇게까지 필승의 신념이 떠오른 적은 없었소. 영국군은 약하니, 반드시 퇴각할 거요. 보급에 대한 우려는 착각이라 할 수 있소. >---- >[[일본방송협회|NHK]]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https://www.youtube.com/watch?v=6QVyC_DSqLo|《도큐먼트 태평양전쟁 제4부, 책임 없는 전장 버마, 임팔》]] >---- >이 시리즈는 원래 NHK 스페셜 중 특별기획의 일환으로, 1989~91년 [[냉전]]이 붕괴되며 각종 자료가 쏟아지자 그를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당시 총제작지휘를 맡았던 야마모토 하지메(山本 肇, 1940~2006) CP는 상당히 개념찬 인물로 새로운 자료를 바탕으로 [[일본군]]의 무능과 반성 없는 일본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나마 1~3부를 제작하고 몇 달의 텀을 둔 후 4~6부를 제작, 총 6부작으로 완결지었다. 그런데 1, 3, 6부는 NHK 제작 다큐가 아니고[* 1, 3, 6부는 '결정판 다큐멘터리 태평양전쟁사' 시리즈로, 1990년에 일본 콜롬비아 회사에서 카와노 야스히코 감독에 의해 제작된 다큐멘터리다.] 2, 4, 5, 7부만 NHK판이다.[* 각각 2부, 4부, 5부, '''6부'''다. 나머지 1부와 3부는 유튜브에 따로 올라와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p6PS4_Oi08|1부]], [[https://www.youtube.com/watch?v=ii_KhTveP_Q|3부]].] 감상시 주의 요망. 참고로 야마모토 CP는 이후 1994년 NHK 시즈오카국장으로 영전되었다.[* 일본에서 샐러리맨의 [[좌천]]은 [[영전]]의 형식으로 일어난다. 정말 큰 잘못을 하지 않으면 종신 고용과 연공 서열이 보장되는 일본 특성상 어지간히 무능해서는 일정 기간 이상 지나면 무조건 진급을 시켜주는데, 강등이나 진급 제한은 범죄라도 저지르지 않는 한 없다. 따라서 진급은 시켜야겠는데 아무리 일을 시켜봐도 도저히 쓸 데가 없거나 정말 쫓아내고 싶어 미치겠으면 진급은 시키되 한직으로 보내서 우회적으로 이제 너는 회사에 필요하지 않으니 알아서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든가, 그럴 자신이 없으면 조용히 지내다가 명퇴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다만 보통은 조금 주목도가 낮은 부서에 진급 시켜 보내는 식이기 때문에 이 정도 처사는 굳이 비유를 하자면 재벌그룹 회장의 비서실장이던 사람이 어느 날 지방의 조그만 생산공장 사장으로 임명된 셈이다. 명목상으로는 비서에서 한 생산공장의 사장으로 올라간 영전이지만, 그룹 회장의 비서실을 통째로 관리하며 회장의 모든 권력 행사를 꿰뚫고 또 마음만 먹으면 이를 얼마든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핵심 요직에서 하루아침에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지방 한직으로 밀려난 것. 물론 필요 없는 직원은 일본에서도 한직으로 보내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 정도로 철저한 좌천은 아무리 미워도 오랜 기간 회사에 [[열정페이]]로 봉사한 사람의 경력만은 존중해 주는 게 원칙인 일본에서 정말 쫓아내고 싶어서 미치기 직전에는 할 수 없는 처사이다.] NHK를 퇴직한 후 자신이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교재로 반전 강연 활동을 했다. [[임팔 작전]]은 [[미얀마|버마]]에서 아라칸 산맥을 직접 넘어 [[인도 제국]]의 북부인 아삼을 기습해 직접 압박한다는 계획이었다. 작전 입안과 강행 자체가 자신의 체면 때문이었다고 주위에서 증언한다. 지형이고 적군 상태고 생각조차 하지 않고 개인이 휴대할 만한 최대량의 물자만 감안해서 15일짜리 작전이라고 휘하 부대에 지시하고는, 실제 작전 기간은 3달이 넘어갔다. 그리고 이 작전을 승인한 [[도조 히데키]]도 다른 전장의 전황이 나빠서 정권을 유지하러 작전을 인가했다는 증언도 아직 있다. 작전 최종 인가를 자기 집 [[목욕탕]]에서 했다는 점이 웃기다. 이 때문에 임팔 작전의 결재는 '목욕탕 결재'라고도 한다. [[영국군]]과 마주칠 때 병력의 절반 이상이 영양 부족과 피로로 전투가 힘들었지만 그 뒤로도 보급을 제대로 안 했다. [[임팔 작전]]에서 굶어 죽어가는 [[일본군]]들의 모습을 알려면 《[[여명의 눈동자]]》에서 먹을 게 없어서 풀뿌리를 씹고, 독충인 [[노래기]]를 잡고, [[뱀]]까지 산 채로 먹는 장면을 보자. 그게 바로 임팔 작전의 현실이다. 휘하 부대장이 계속 철수를 요구하고 부하들이 전장에서 뜻 없이 죽어나가는 상황을 알면서도 진격하라며 계속 독촉하고선 무타구치 자신은 초조했다. 작전 실패가 확실해서 상황을 파악하러 온 버마 사령관 가와베가 무타구치를 찾아왔지만 둘 다 아무 말도 못했고 달라진 것도 없었다. 그 까닭이 참 어처구니없었다. >[[가와베 마사카즈|가와베]]: 무타구치 중장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다. > >무타구치: 나는 가와베 장군의 참된 심중은 작전 지속에 대한 나의 생각을 떠보기 위한 것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그것을 장군에게 실토할 수 없었다. __나는 다만 먼지투성이인 내 풍모를 보고 장군이 알아차려 주기만을 바랐다.__ > >가와베: 나는 랑군으로 돌아왔다. 내 눈에는 귀기 어린 빗속에서 일선을 지키는 장병들, 특히 파렐 전선에서 악수를 나눈 인도 국민군 장병들의 모습이 역력히 떠올랐다. 만일 냉정하게 이 전황을 판단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이미 이때 작전 중지를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전에는 나의 생각 이외에 보다 더 큰 성격이 있었다. 어떤 방법이든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단 하나라도 남아있다면 그것으로 최후까지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 >무타구치: 저는 작전이 실패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상부에 보고를 할 수 없었기에 작전을 그대로 진행하면서 명령이 하달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후 [[미군]]의 심문을 받으면서 진술한 내용) 체면 때문에 차마 후퇴하겠다고 말도 못하며 후퇴하라고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다가 끝내 말을 못했다는 부분이 핵심. [[다테마에]], 눈치껏 알아차리기를 중시하는 일본인 특유의 간접적 의사 소통의 문제를 매우 잘 보여주었다. 문제는 병사들의 목숨이 실시간으로 왔다갔다 하는 와중에 그저 장군 개인의 체면 때문에 서로 말도 제대로 안 하고 알아맞히기 게임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진술을 [[미군]] 헌병이 듣자 빵 터져서 5분이나 웃어댔다고 한다. 끝내 전투는 참다 참다 피골이 상접한 채 [[임팔 전투#s-6.2|자신들의 비관적인 처지를 노래하는]] 부하들의 꼴을 보고 있던 휘하 31사단장 [[사토 고토쿠]] 중장이 독단으로 후퇴를 결정할 때까지 이어졌다. 참고로 이것이 [[일본 육군]] 창설 이래 일어난 [[항명]] 사건 '''1호'''다. 심지어 이 항명은 당시 일본 군법상으로도 정당했다. 내 휘하 부대가 다 굶어죽게 생겼는데, 상급부대에서 아무 대책도 없이 계속 현 위치를 고수하라고만 명령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퇴 결정을 내렸을 때 사토의 부하들이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바로 이 사토 중장이 무타구치를 만나러 왔을 때, 무타구치는 자결해 버리라며 단도를 남겨두고 정작 자신은 사토 중장을 보기 부끄러웠는지 숨어버리는 추태를 부렸다. 이에 크게 분노한 사토는 "이 칼로 무타구치의 배때기를 쑤셔버리겠다." 하고 이를 갈며 칼을 갖고 나가버렸다고 한다. 당시 31사단장 사토 중장이 얼마나 열 받았는지는, 그가 무타구치의 15군 사령부에 보낸 전문에서 절절히 알 수 있다. >공격 계속 명령 접수했음. 그러나 명령만으로 병력이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귀하의 사고방식이야말로 이 작전을 실패로 이끌어가는 중대요인이 되고 있음. 눈 앞의 본 사단의 1만 장병은 아사 직전 상태에 놓여있음. 탄약은 고갈되어 맨손의 병력이 되어버렸음.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 것은 모두가 귀 제15군에게 그 책임이 있음. 귀군은 이상 사실을 판단, 반성하여 본 작전을 즉시 중지함으로써 [[천황|폐하]]의 적자들을 개죽음으로 이끄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과감한 조치를 강구하기 바람. 이러한 전문이 계속 날아오자 무타구치의 참모들이 사토 중장을 달래러 찾아왔는데, 오히려 "너희들은 무슨 낯짝으로 여기 왔냐! 우리들의 적은 [[영국군]]이 아냐. 바로 너희 제15군이란 말이다!"라고 외치며 길길이 날뛰는 바람에 찍소리도 못하고 돌아왔다. 게다가 독단적으로 철수하기로 마음 먹고는 참모진과 부하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을 만큼 화가 났었다. >지금 우리 사단의 위에는 머저리 집단 셋이 있다. 제15군과 버마방면군과 남방총군이다.[* 나중에는 [[대본영]]까지 들어가 총 넷이 되었다.] 이런 머저리들을 믿고 기다리다간 우리 사단이 전멸하고 말 것이다. 이에 본 사단의 퇴각을 본관 책임하에 독단 결행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대본영은 무타구치의 주장에 따라 [[사토 고토쿠|사토 중장]]에게 판단력상실이라는 진단을 내려 불기소로 끝낸 다음 연금했다. 평소의 [[일본군]]이라면 저런 때에는 아무리 장군이라도 불명예 제대, 군법회의, 심하면 [[할복]]이다. 그런데 저렇게 약한 조치로 끝난 까닭도 웃기는데 군법회의가 열리면[* 사토 고토쿠는 군법회의에 회부될 시 임팔 작전과 관련된 인물들과 군부를 규탄하려 했다고 한다.] 사토의 사단장 임명에 관여한[* 왜 이런 표현을 썼냐면 일단 임명 자체는 형식적으로나마 덴노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군 중추부 내의 인물들도 왜 문제가 있는 인물을 사단장이 되게 했는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여튼 사토에 대한 [[일본군]] 높으신 분들의 평가는 '[[임팔 작전]]의 실패를 가져온 원흉'이었지만 사토의 부하들 평가는 당연히 정반대였다. 반대로 작전 책임자인 무타구치는 15군 총 철수 이전에 '시찰'을 명목으로 먼저 도망간 사실이 드러났지만 겨우 예비역 편입이라는 경미한 징계를 받았을뿐더러 육군 예과 [[사관학교]] [[교장]]으로 좌천되는 걸로 끝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